AI 칩의 미래, ‘유리’에 달렸다
반도체 패키지의 핵심 소재가 유리로 바뀌고 있다. 더 빠르고 에너지 효율적인 AI 컴퓨팅을 위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유리 기판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인류가 유리를 만들기 시작한 지 수천 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세계 최신 초대형 데이터센터에서 사용되는 AI 칩에 적용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올해 SKC의 반도체 소재 자회사 앱솔릭스는 차세대 컴퓨팅 하드웨어의 성능과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설계된 특수 유리 패널의 상용화를 시작할 계획이다.
인텔을 비롯한 여러 기업도 이 분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러한 유리 기술은 AI 데이터센터에 사용되는 고성능 컴퓨팅 칩의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생산 비용이 낮아진다면, 결국 일반 소비자용 노트북과 모바일 기기에서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기술의 핵심은 유리를 기판(층)으로 사용해 여러 실리콘 칩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패키징’ 기술은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여러 특수 칩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컴퓨팅 하드웨어 설계에서 점점 더 널리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고부하로 작동하는 칩이 과열되면서 장착된 기판을 물리적으로 뒤틀리게 할 수 있다는 점 등 여러 기술적 과제도 안고 있다. 이로 인해 부품 정렬이 어긋날 수 있고, 칩의 냉각 효율이 떨어져 손상이나 조기 고장을 초래할 수 있다.
칩 설계 기업 AMD의 딥팍 쿨카르니(Deepak Kulkarni) 선임 연구원은 “AI 워크로드가 급증하고 패키지 크기가 커지면서 업계는 고성능 컴퓨팅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현실적인 기계적 제약에 직면하고 있다”며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가 바로 기판 뒤틀림”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유리가 해결책으로 떠오르고 있다. 유리는 기존 기판보다 높은 열을 더 잘 견딜 수 있으며, 엔지니어들이 칩 패키지를 계속 소형화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칩을 더 빠르고 에너지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쿨카르니 선임 연구원은 “이는 ‘기계적 한계’에 부딪히지 않고 패키지 크기를 계속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전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앱솔릭스는 첨단 칩용 유리 기판 생산 전용 공장을 미국에 완공했으며 올해 상업적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 역시 차세대 칩 패키지에 유리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텔의 연구는 칩 패키징 공급망에 속한 다른 기업들의 투자도 자극했다. 한국과 중국 기업들도 초기 도입 기업 가운데 하나다.
시장조사 기관 욜 그룹(Yole Group)의 빌랄 하체미(Bilal Hachemi) 수석 기술·시장 분석가는 “역사적으로 반도체 패키징에 유리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생태계가 훨씬 더 견고하고 광범위하다”며 “유리 기반 기술에 대한 필요성도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취약하지만 강력하다
라훌 마네팔리(Rahul Manepalli) 인텔 첨단 패키징 부문 부사장에 따르면 칩 패키징은 1990년대부터 유리섬유 강화 에폭시와 같은 유기 기판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전기화학적 제약 때문에 칩과 시스템의 나머지 부분을 연결하는 구리 코팅 신호·전원 연결을 만들기 위한 미세 구멍을 촘촘하게 배치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칩 설계자들은 칩이 가열되고 냉각되는 과정에서 유기 기판이 겪는 예측하기 어려운 수축과 변형도 고려해야 한다. 마네팔리 부사장은 “우리는 약 10년 전 유기 기판이 한계에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유리는 이러한 한계 중 상당 부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마네팔리 부사장에 따르면 유리의 높은 열적 안정성 덕분에 엔지니어들은 유기 기판보다 밀리미터당 최대 10배 더 많은 연결을 만들 수 있다. 연결 밀도가 높아지면 동일한 패키지 면적에 더 많은 실리콘 칩을 집적할 수 있다. 인텔의 경우 설계상 같은 면적에 최대 50% 더 많은 칩을 배치할 수 있어 연산 성능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연결 밀도가 높아지면 칩에 전력을 공급하는 구리 배선의 경로를 더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유리가 열을 더 효과적으로 발산한다는 점은 전체 전력 소비를 줄이는 칩 설계를 가능하게 한다.
마네팔리 부사장은 “유리 코어 기판의 장점은 분명하다”며 “이러한 장점이 업계로 하여금 조만간 이를 현실화하도록 이끌 것이며, 우리는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실현하는 기업 중 하나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리 사용에는 기술적 난제도 있다. 무엇보다 유리는 깨지기 쉽다. 마네팔리 부사장은 데이터센터 칩 패키지에 사용되는 유리 기판이 두께 약 700마이크로미터에서 1.4밀리미터에 불과해 균열이나 파손이 발생하기 쉽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인텔과 다른 연구기관의 연구진은 수년 동안 다양한 소재와 특수 장비를 활용해 유리 패널을 반도체 제조 공정에 안전하게 통합하는 방법을 개발해 왔다.
마네팔리 부사장에 따르면 현재 인텔 연구개발팀은 유리 패널을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이를 적용한 테스트 칩 패키지를 제작하고 있다. 또 2025년 초에는 유리 코어 기판을 탑재한 작동 가능한 장치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체제를 실제로 부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초기 테스트 단계에서는 며칠마다 수백 개의 유리 패널이 깨지곤 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진전”이라고 덧붙였다.
반도체 제조사들은 이미 실리콘 웨이퍼의 임시 지지 구조물 등 제한적인 용도로 유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독립 시장조사기관 IDTechEx는 유리 기판 시장이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전망한다. 이에 따르면 반도체용 유리 시장 규모는 2025년 10억 달러(약 1.5조 원)에서 2036년에는 최대 44억 달러(약 6.6조 원)까지 성장할 수 있다.
이 소재가 본격적으로 확산될 경우 추가적인 장점도 기대된다. 유리는 유기 기판보다 최대 5,000배 더 매끄럽게 만들 수 있다. IDTechEx의 샤오시 허(Xiaoxi He) 연구 분석가는 이러한 특성이 반도체 위에 금속을 증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결함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층에서 결함이 발생하면 칩 성능이 저하되거나 심지어 칩을 사용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유리는 데이터 전송 속도를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소재는 빛을 유도할 수 있어 칩 설계자들이 기판 내부에 고속 신호 경로를 직접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AMD의 쿨카르니 선임 연구원은 “유리는 에너지 효율적인 AI 컴퓨팅의 미래에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빛 기반 시스템은 현재 패키지 내 칩 사이의 신호 전달에 사용되는 ‘전력 소모가 큰’ 구리 경로보다 훨씬 적은 에너지로 신호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패널로의 전환
유리 패키징에 대한 초기 연구는 2009년 조지아 공과대학교의 3D 시스템 패키징 연구센터에서 시작됐다. 이후 이 대학은 화학 및 첨단 소재 기업인 한국의 SKC 자회사 앱솔릭스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SKC는 2024년 미국 조지아주 코빙턴에 유리 기판 제조를 위한 반도체 공장을 건설했다. 앱솔릭스와 조지아 공대의 유리 기판 협력 프로젝트는 같은 해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한 미국 반도체 지원 정책인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해 두 건의 보조금을 지원받았다. 규모는 총 1억 7,500만 달러(약 2,600억 원)에 달한다.

현재 앱솔릭스는 상용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올해부터 고객을 위한 소량의 유리 기판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앱솔릭스에 따르면 현재 공장은 연간 최대 1만 2,000제곱미터의 유리 패널을 생산할 수 있다. 이 정도 생산량이면 엔비디아 H100 GPU 크기의 칩 패키지 약 200만~300만 개에 필요한 유리 기판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추산된다.
하지만 앱솔릭스만 유리 기판 개발에 나선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LG이노텍을 포함한 여러 대형 제조사들이 지난 1년 동안 유리 패키징 연구와 시범 생산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유리 기판 생태계가 초기 선도 기업 중심에서 보다 광범위한 산업 경쟁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기업들은 유리 기판 공급망에서 보다 전문화된 역할을 맡기 위해 사업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전자제품용 전기 커넥터와 강화유리를 생산하는 제이앤티씨는 2025년 월 1만 장의 반제품 유리 패널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한국에 구축했다. 이 패널에는 수직 전기 연결을 위한 구멍이 뚫려 있고 얇은 금속층이 코팅돼 있지만 실제 칩 패키지에 적용하려면 추가적인 제조 공정이 필요하다.
이 한국 공장은 지난해부터 전문 기판 기업과 반도체 제조사들을 대상으로 반제품 유리 공급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제이앤티씨는 2026년에 이 시설의 생산 능력을 확대하고 2027년에는 베트남에 추가 생산 라인을 구축할 계획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리 기판 기술이 시제품 단계에서 상용화 단계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많은 기술 기업들이 유리가 미래 컴퓨팅과 AI 산업의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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