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을 위한 변명
에어컨, 정말 기후 악당일까?
솔직히 말하면 필자 역시 에어컨을 기후 문제의 주범으로 지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앞서 여러 기사와 뉴스레터에서 필자는 에어컨이 전 세계 전력 소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온 상승과 함께 그 소비량도 더욱 증가할 것이라고 지적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필자는 에어컨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 또한 누구보다 먼저 인정하고 싶다. 기후변화가 심화될수록 에어컨은 지금보다 훨씬 더 필수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유럽에서는 치명적인 폭염이 발생한 이후 이상하리만큼 애꿎은 에어컨이 악당으로 몰리고 있다.
물론 에어컨 사용으로 인해 전력 소비가 증가하는 문제에는 분명 경각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에어컨 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에어컨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겨울철 난방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방은 에어컨처럼 비난받지 않는다. 냉방과 난방은 모두 단순한 편의 이상의 존재, 즉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에어컨만 기후 악당으로 낙인찍히는 걸까?
2025년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 유럽 전역은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렸다. 극단적인 기상현상을 연구하는 국제 기구인 WWA(World Weather Attribution)가 발표한 예비 분석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2,300명을 넘었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1,500명이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로 인해 발생한 사망이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기후변화로 기온이 상승하지 않았다면 사망자 수는 800명 미만에 그쳤을 것이라는 의미다.
공식적인 사망자 집계가 나오기까지는 몇 달이 더 걸릴 수 있지만, 이 초기 통계만 보더라도 폭염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준다. 유럽은 특히 취약하다. 많은 국가, 특히 북유럽 국가에서는 에어컨 보급률이 낮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더운 날이면 선풍기를 틀거나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여름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영국 기상청(Met Office)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영국의 평균 기온은 1961년부터 1990년 사이에 비해 1.24 °C나 상승했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영국 전역의 주택 실내 온도가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불쾌할 정도’ 혹은 ‘위험할 정도’로 덥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기온 상승이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에어컨 사용은 빠르게 늘고 있으며, 과거에 에어컨 보급률이 낮았던 나라들조차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장기적인 추세에 대한 반응은 매우 격앙되어 있다. 특히 최근의 폭염을 겪으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두드러졌다. 소셜미디어와 여론지에서는 에어컨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넘쳐났고, 많은 이들이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격적인 의견을 말하기에 앞서, 필자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미국에서는 약 90%의 가정이 에어컨을 사용해 냉방을 한다. 어쩌면 이 점이 필자가 에어컨에 다소 호의적인 입장을 갖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어컨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는 어린 시절 미국 남동부 지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더위가 실제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하며 자랐다. 날씨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당시에도 기온이 32°C를 훌쩍 넘는 날이 많았고, 습도는 지나치게 높아 문밖에 나서는 순간 옷이 몸에 달라붙곤 했다.
이처럼 덥고 습한 환경에서 활동하거나 일하는 것은 열사병 위험을 높인다. 단기적으로는 문제가 보일 수 있지만, 장기간 고온에 노출될 경우 심장이나 신장에 부담이 된다. 특히 노인, 어린이, 만성질환자 같은 취약한 이들에게는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에어컨은 단순한 편의 시설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지키는 안전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 점은 어디에서나 상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실제로 전 세계 많은 지역에서 난방은 ‘안전’을 이유로 반드시 갖춰져야 할 기본 설비로 여겨진다. 누구도 얼어 죽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미국에서 에어컨이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냉방보다 난방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미국에서는 전체 주거용 전력 사용량 중 약 19%가 에어컨에 사용된다. 공간 난방에 사용되는 전력 비중이 12%에 불과하므로 수치상으로만 보면 에어컨이 더 많은 전기를 쓰는 셈이다. 하지만 전기만으로 전체 에너지 소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주택에서는 전기 외에도 다양한 에너지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미국 가정은 난방에 천연가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전력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분명 전체 에너지 소비에는 포함된다.
이 모든 에너지원을 포함해 총 에너지 소비량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 주거 부문에서 난방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2%에 달하는 반면, 에어컨은 고작 9%에 그친다.
물론 여기서 에어컨을 무조건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수준에서 에어컨 같은 냉방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단지 시원함을 추구하며 시스템을 최대 출력으로 가동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또한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에어컨 수요가 급증할 것에 대비해, 전력망을 어떻게 설계하고 준비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변하고 있고 기온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이 상황에서 누군가의 책임을 묻고 싶다면, 비난의 대상은 에어컨이 아닌 열기를 머금은 대기 자체를 향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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