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범죄 공범자 ‘장내 미생물’

장내 미생물이 신경계와 직접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행동과 충동 조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등장하고 있다.

몇 년 전 벨기에에서 한 30대 남성 운전자가 가로등을 두 번 들이받았다. 당시 그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법적 기준치의 4배에 달했다. 그는 수년 동안 음주 운전 혐의로 세 번이나 적발되었지만 매번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후 의사는 그에게 몸이 스스로 알코올을 생성하는 ‘자가 양조 증후군(auto-brewery syndrome)’이라는 희귀질환을 진단했다. 그가 섭취한 음식 속 탄수화물을 장내 미생물이 발효시켜 에탄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2024년 음주 운전 혐의를 벗었다.

이 사례를 비롯한 몇몇 과학적 연구들이 미생물학과 신경과학과 법학에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인간의 행동 중 어디까지 장내 미생물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우리 몸에는 세균과 세균과 비슷한 미생물인 고세균, 곰팡이, 심지어 바이러스까지 수많은 미생물이 공존한다. 이 중 대부분이 장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수는 수조에 이른다. 즉 인간 몸에는 인간 세포 수보다 미생물의 세포 수가 더 많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인간보다 미생물에 더 가깝다.

미생물학자들은 이 수많은 미생물의 역할을 아직 파악하고 있다. 일부 미생물은 음식물을 분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어떤 것은 건강에 중요한 화학물질을 합성한다. 하지만 전체 그림은 매우 복잡한데, 일단 미생물 간 상호작용만 해도 무수히 많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생물은 인간의 신경계와도 상호작용한다. 이들은 뉴런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화합물을 생성할 수 있고, 면역 체계의 기능을 건드려 뇌에 연쇄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또한 미생물이 자율신경계의 부교감신경에 속하는 감각신경인 미주신경을 통해 뇌와 직접 소통하는 듯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만약 미생물이 사람 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이것으로 범죄를 포함한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일부 미생물학자들은 이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캐나다 겔프대학교의 엠마 앨런버코(Emma Allen-Vercoe) 미생물학 교수는 “미생물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통제한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미생물학을 형사법에 적용하는 개념으로 ‘리걸롬(legalome)’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서호주 대학교의 면역학자이자 소아과 의사인 수전 프레스콧(Susan Prescott)과 동료들은 “미생물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하면 향후 법적 판결뿐 아니라 범죄 예방 및 재활 방식도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레스콧은 “자가 양조 증후군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저지른 범죄는, 사실 미생물이 꼭두각시처럼 줄을 당긴 결과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자가 양조 증후군은 비교적 단순한 사례로, 현재까지 최소 두 명이 이 증후군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뇌와 미생물 간의 연관성은 훨씬 더 복잡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미생물에 대해서는 한 가지 알려진 것이 있다. 바로 톡소플라즈마 곤디(Toxoplasmosis gondii)라는 기생충인데, 이것은 고양이의 몸 안에서 번식하면서 배설물을 통해 다른 동물에게 전파된다.

이 기생충은 쥐가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기 쉽게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기생충에 감염된 쥐는 고양이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영구적으로 잃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을 대상으로는 아직 단정 지을 만한 사실이 밝혀진 바 없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이 기생충 감염이 성격 변화, 공격성과 충동성 증가와 관련이 있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앨런버코는 “이건 뇌에 영향을 미쳐 형사 재판에서 법적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례”라며 “그 사람들이 ‘내 미생물이 시켰다’고 말하면, 나는 그 말을 믿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쥐는 가장 많이 연구된 동물 중 하나로, 이들을 대상으로 장내 미생물과 행동 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증거도 점점 늘고 있다. 한 연구에서 한 동물의 분변을 다른 동물의 장에 주입하는 ‘분변 이식’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이식하면 장내 미생물 군집을 일부 교체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술은 인간에서 디피실리균(C. difficile) 감염 치료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보인다.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의 과학자들이 성격이 소심한 쥐와 사교적인 쥐 사이에 분변을 서로 이식했던 실험이 있다. 그 결과 쥐들의 행동이 바뀌는 경향을 보였다. 소심한 쥐가 더 사교적이게 되고, 사교적인 쥐는 오히려 소극적으로 변했다.

이후 미생물학자들은 물론 쥐를 대상으로 한 사례이긴 하지만, 이 연구를 장내 미생물의 변화가 행동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로 꼽아 왔다. 앨런베코는 “하지만 진짜 궁금한 건, 미생물이 인간을 얼마나 통제하며 인간은 그 통제를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느냐 여부”라면서도 “이는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답했다.

사실 인간 장내 미생물은 비교적 안정적이긴 해도 충분히 변할 수 있다. 식단, 운동 습관, 생활 환경, 심지어 같은 곳에 사는 동거인까지도 우리 몸 안팎에 사는 미생물 군집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미생물 군집의 변화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따라서 특정 미생물과 범죄 행동 간의 정확한 연관성을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앨런버코는 “누군가의 장내 미생물을 보고 범죄 여부를 예측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레스콧은 “미생물학과 대사체학의 발전이 미생물과 그들이 생성하는 화학물질, 그리고 범죄행동 사이의 연관성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이러한 연구가 범죄 행동의 치료 가능성까지 열 수 있을지 모른다. 언젠가 미생물 기반 치료법이 치료 프로그램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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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5월 15일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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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일: 2025년 05월 15일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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