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으로 그리는 건축의 미래

건축가 아르닐두르 팔마도티르는 어린 시절 목격한 화산 분화를 계기로 건축가들이 상상의 한계를 다시 그릴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아르닐두르 팔마도티르(Arnhildur Pálmadóttir)는 어린 시절 거실 창밖으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북동부 해안에 위치한 그녀의 집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화산이 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불길한 장면은 깊은 인상으로 남아 그녀의 무의식에 스며들었다. 이후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빛줄기가 꿈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곤 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세 살이었다.

팔마도티르가 ‘어둡고 기이한 기억’이라고 회상한 그 꿈들은, 50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용암을 건축 자재로 삼아 도시를 만들겠다는 특별한 사명을 가진 건축가로 성장시켰다. 현재 그녀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ík)에서 건축 스튜디오 ‘S.AP 아르키텍타르(S.AP Arkitektar)’를 운영 중이다. 동시에 건축 자재의 재활용을 전문으로 하는 덴마크 건축 회사 렌다가르(Lendager)의 아이슬란드 지사도 이끌고 있다.

팔마도티르는 단 하나의 화산 분화로 분출되는 용암만으로도 한 도시 전체의 기초를 놓기에 충분한 건축 자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녀는 지난 5년 넘게 ‘라바포밍(Lavaforming)’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이 가능성을 탐구해 왔다. 동료이자 아들인 아르나르 스카르프헤딘손(Arnar Skarphéðinsson)과 함께 세 가지의 실현 가능성 있는 기법도 고안해 냈다. 마그마 층을 직접 천공해 용암을 추출하는 방법, 미리 파둔 지형에 녹은 용암을 흘려보내 도시의 기초로 만드는 방법, 그리고 유리 성형 기술처럼 용암을 3D 프린팅해 벽돌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2022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디자인마치(DesignMarch)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이 개념을 발표했다. 그리고 올해에는 상상 속의 미래 도시 ‘엘드보르그(Eldborg)’를 배경으로 한 SF 단편 영화 제작에도 착수했다. 영화 제목 역시 ‘라바포밍’이며, 2150년을 배경으로 용암을 건축 자재로 활용하는 기술을 익힌 엘드보르그 시민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오는 5월 세계적인 건축 축제 ‘베네치아 비엔날레(Venice Biennale)’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lava around a structure
2150년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SF 영화 ‘라바포밍(Lavaforming)’은 용암으로 지어진 가상의 도시를 그린다.
COURTESY OF S.AP ARKITEKTAR

전 세계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약 37%는 건축물과 콘크리트, 철강 같은 건축 자재에서 발생한다. 이를 줄이기 위해 자연 소재나 기존 자원을 활용하자는 건축가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흙과 물을 섞어 틀에 붓는 일과 섭씨 1,100도에 달하는 용암을 다루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럼에도 팔마도티르는 이미 아이슬란드에서 진행 중인 다수의 연구에 기반해 그 가능성을 좇고 있다. 아이슬란드에는 현재 활동 중인 화산만 30곳에 이른다. 2021년 이후 레이캬네스반도(Reykjanes Peninsula)에서는 분화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이 지역은 수도 레이캬비크는 물론 블루 라군(Blue Lagoon) 같은 대표 관광지와도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에서 2024년 한 해에만 여섯 차례나 화산이 분화했다. 이처럼 빈번한 화산 활동 덕분에 화산학자들은 용암이 어떤 방식으로 흐르는지 더욱 면밀히 관찰하고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됐다.

팔마도티르의 프로젝트에 자문을 제공한 아이슬란드기상청(Icelandic Meteorological Office, IMO) 소속 화산학자 그로 비르케펠트 페데르센(Gro Birkefeldt M. Pedersen) 박사는 “우리는 지금 이 괴물을 열심히 뒤쫓고 있다”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워낙 많아 따라잡는 것도 벅차지만, 어떻게든 놓치지 않고 대비하려 애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팔마도티르가 제시한 이 구상은, 언젠가 화산학자들이 용암의 흐름을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도시 차원에서 이를 건축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용암이 언제, 어디로 흘러갈지를 미리 파악해 도랑을 파두면, 화산이 분화했을 때 용암이 그 도랑을 따라 흘러 들어가 굳게 되고, 그것이 곧 건축물의 기초나 벽체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용암 흐름을 예측하는 일이 매우 복잡한 과학 기술을 필요로 한다. 원격 감지 기술뿐 아니라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시뮬레이션에도 막대한 연산력이 요구된다. IMO는 새로운 분화가 발생할 때마다 두 가지 시뮬레이션을 병행한다. 하나는 과거의 분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예측이고, 다른 하나는 분화 직후 수집한 최신 데이터를 반영한 추가 분석이다. 이 최신 데이터는 특수 장비를 장착한 항공기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집된다. 이렇게 분화가 반복될수록 축적되는 데이터는 늘어나고, 그만큼 용암 흐름 예측의 정확도도 높아진다. 페데르센 박사는 “아직 연구해야 할 부분이 많다”면서도 “앞으로 10년 안에 상당한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팔마도티르와 스카르프헤딘손은 현재 제작 중인 영화 속 가상 도시 ‘엘드보르그’를 설계하기 위해, 페데르센 박사가 용암 시뮬레이션에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3D 모델링 소프트웨어를 활용했다. 영화 속 엘드보르그는 수차례의 화산 분화를 통해 도랑 속에 용암이 채워지며 지반이 형성되고, 그 위에 세워진 도시다. 건물 역시 용암 벽돌로 지어졌다. 팔마도티르는 “건물 설계는 자연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이들이 구상하는 도시는 현대적인 도시보다는 판타지 세계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팔마도티르는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처럼 보일 것”이라며 “하지만 외형은 핵심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동시대 건축가들에게 자극을 주고, 기후 변화가 도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둘러싼 시급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데 있다. 팔마도티르는 흔히 ‘문샷 싱킹(Moonshot Thinking)’라고 불리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건축가가 현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만약 우리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기존 시스템 안에서만 안주한다면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팔마도티르는 1972년 고래 관광지로 유명한 아이슬란드의 작은 도시 후사비크(Húsavík)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바다보다 오히려 우주와 기술에 더 가까웠다. 건설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소형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팔마도티르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하늘을 날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사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은 전적으로 아버지 덕분”이라며 “이 관심이 훗날 화산 연구를 시작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또 아이슬란드에서는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화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21세에 노르웨이로 건너가 3D 시각화 분야에서 7년간 일한 뒤, 다시 레이캬비크로 돌아와 아이슬란드예술대학교(Iceland University of the Arts)에서 건축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하지만 진정한 전환점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카탈루냐 고급 건축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Architecture of Catalonia)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찾아왔다. 그녀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녀는 “예전에는 건축이 마치 하나의 상품처럼 느껴졌고, 건축가는 투자사의 노예처럼 보이기도 했다”며 “하지만 이제는 그 안에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COURTESY OF S.AP ARKITEKTAR

COURTESY OF S.AP ARKITEKTAR
COURTESY OF S.AP ARKITEKTAR
COURTESY OF S.AP ARKITEKTAR

고체 상태의 용암은 이미 강도와 내구성이 뛰어난 건축 자재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해왔다. 팔마도티르와 스카르프헤딘손은 여러 차례의 화산 분화를 통해 용암으로 채워진 도랑을 기반으로, 용암 벽돌로 지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미래 도시를 구상하고 있다.

팔마도티르는 2009년 레이캬비크로 돌아와 건축가로 활동하다가, 2018년 스튜디오 아르닐두르 팔마도티르(Studio Arnhildur Pálmadóttir)의 약자를 딴 건축사무소 S.AP 아르키텍타르를 설립했다. 그녀의 아들은 2019년부터 함께 일하기 시작했으며, 올해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건축연구소(Southern California Institute of Architecture)를 졸업한 뒤 공식적으로 건축가로 합류했다.

2021년 두 사람은 레이캬네스반도의 파그라달스피아들(Fagradalsfjall) 화산 인근에서 생애 처음으로 화산 분화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 현장에서 팔마도티르는 지구 내부를 흐르는 엄청난 양의 물질에 주목했고, 그것을 인위적인 경로로 유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용암은 이미 단단하고 오래 유지되는 건축 재료로서의 잠재력을 입증해 왔다. 용암은 식으면서 현무암이나 유문암 같은 화산암으로 굳어지는데, 어떤 암석으로 변하느냐는 용암의 화학적 성분에 따라 달라진다. 이 가운데 아이슬란드와 하와이에서 볼 수 있는 현무암은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암석 중 하나로, 이로 만든 구조물은 탁월한 강도와 내구성을 자랑한다.

멕시코, 아이슬란드, 하와이 등 용암이 풍부한 지역의 이미 수년 전부터 건축가들이 화산암을 이용한 건축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이 암석을 채굴하고 절단한 뒤 장거리로 운반하려면 막대한 에너지와 대형 장비가 필요하며 그만큼 탄소 배출량도 클 수밖에 없다. 반면 용암이 아직 액체 상태일 때 이를 활용할 수 있다면, 지속가능한 건축을 위한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화산 활동 전문가인 제프리 카슨(Jeffrey Karson) 교수는 용암이 건축 자재로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는 시러큐스대학교(Syracuse University) 명예교수이자 ‘시러큐스대학교 용암 프로젝트(Syracuse University Lava Project)’의 공동 설립자로, 지난 15년간 거대한 가마를 이용해 용암을 인위적으로 분출시키는 실험을 1,000회 넘게 진행하며 그 물성을 연구해 왔다. 카슨 교수는 “용암이 식는 과정에서 강도를 높일 방법만 찾아낸다면, 이 재료는 상당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를 통해 용암이 흐를 때 금속 막대를 삽입하면 비균일한 냉각으로 인한 열 균열(thermal cracking)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콘크리트 속 철근이 구조적 강도를 보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용암 역시 유리나 다른 액체 재료처럼 냉각 속도에 따라 물성이 달라지는데, 천천히 식을수록 결정이 형성돼 강도가 높아진다. 이와 같은 결정 형성 과정을 가마(kiln) 안에서 인위적으로 재현해 냉각 속도를 조절한다면, 용암의 강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제어된 냉각은 벽돌처럼 소규모 단위에서는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며 “벽을 만드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팔마도티르 역시 현재 마주한 도전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과 스카르프헤딘손이 탐구 중인 기술이 평생 동안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가 건축계에 던질 파장만으로도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다.

카슨 교수와 페데르센 박사 역시 이 재료의 가능성을 제대로 확인하려면 더 많은 실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스카르프헤딘손에게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잠재력은 건축 산업의 영역을 넘어선다. 12년 전 아이슬란드 국민은 화산, 낚시터 등의 자연 자원을 국가의 소유로 선언해야 한다는 국민투표에 찬성했다. 이는 앞으로 화산 분화로 생성된 용암으로 지어진 도시가 거대 자본이나 기업이 아닌, 국가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다만 이 국민투표는 통과 직후 위헌 논란에 휩싸이며 사실상 효력을 잃었다.)

스카르프헤딘손에게 ‘라바포밍’ 프로젝트는 단순히 건축 자재를 다루는 실험이 아니다. 그는 “용암이 지닌 정치적 함의에 더 주목하고 있다”며 “내가 세상에서 보고 싶은 변화는 바로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프로젝트는 보다 급진적인 사회적 전환을 고민하게 만들 수 있으며, 자원의 활용 방식을 시민이 직접 결정하고 수익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는 ‘사회적 메가시티’를 실현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용암을 건축 자재로 활용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치부하는 냉소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그러나 팔마도티르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녀의 생각에 점차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지하 온천을 뚫는 행위 역시 한때는 위험천만한 아이디어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에너지 혁명의 핵심 기술로 자리 잡았다. 과거 석유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아이슬란드는 이제 전기와 난방의 85%를 재생 가능 에너지원에서 얻고 있다. 팔마도티르는 “친구들은 내가 좀 이상한 사람 같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똑똑한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한다”며 웃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 둘 다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쓴 엘리사베타 M. 브랜던(Elissaveta M. Brandon)은 <패스트 컴퍼니(Fast Company)>와 <와이어드(Wired)>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저널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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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5월 03일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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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일: 2025년 05월 04일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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